고려시대 행정조직의 체계와 구조 완전 정복

고려시대 행정조직의 체계와 구조 완전 정복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은 한국 고대국가 행정체계가 본격적으로 정비된 시기로, 이후 조선의 관료제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고, 중앙집권적 체제의 확립을 위해 다양한 행정기관과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이 시기의 행정조직은 당나라의 제도를 일부 계승하면서도 한국적인 특성을 반영하여 발전했습니다.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은 크게 중앙정부 조직과 지방 행정조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중앙에서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기관이 있었고, 그 아래로 행정, 군사, 사법 등 다양한 분야를 관장하는 부서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지방은 5도 양계 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중앙의 명령이 원활히 전달되도록 구성되었으며, 각 지방의 특성에 맞는 통치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또한 고려는 문벌 귀족 중심의 관료 체제를 기반으로 하였고, 이로 인해 행정조직에서도 귀족 세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선발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특정 가문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폐단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려의 정치와 행정 운영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각 기관의 기능과 역할, 운영 방식 등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고려시대 국가 운영의 실체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의 정치 체제의 전반적 개요

고려시대는 초기의 전제 군주적 성격에서 점차 귀족 중심의 정치로 변모해 간 시기였습니다. 왕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였으며,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치는 문벌 귀족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들은 중요한 행정기관의 장을 맡아 국가 운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태봉의 제도를 일부 계승하여 정비된 행정체계를 유지했지만, 성종대에 이르러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인 중앙 집권적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에 유학자들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하고, 관리 임용의 기준이 명확해졌습니다.

왕권과 귀족권의 균형은 고려의 정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요소이며, 이것이 행정조직 전반에 걸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최고 통치 기관,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고려의 중앙행정기관 가운데 핵심은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었습니다. 중서문하성은 국정 전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으며, 상서성은 이를 실행하는 실무 기관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는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분리하여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중서문하성은 문하문지, 중서령, 평장사 등의 고위 관직이 있었으며, 실제로는 문벌 귀족들이 이러한 직위를 독점하며 정치적 실권을 행사했습니다. 상서성은 육부 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의 주요 업무를 실무적으로 담당했습니다.

이 두 기관의 협력과 견제는 고려 중앙 행정의 핵심 축이었으며, 정책의 안정성과 통치력 유지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육부 체제를 통한 부서별 업무 분장

고려의 상서성 아래에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등 6개의 부서가 존재했습니다. 이를 육부 체제라고 하며, 각 부서는 특정한 행정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 이부: 인사 행정을 담당, 관료 임명 및 인재 선발

  • 호부: 재정 및 조세 관련 업무

  • 예부: 의례, 교육, 외교 등 문화 전반

  • 병부: 군사 관련 업무 총괄

  • 형부: 사법 및 형벌 제도 담당

  • 공부: 토목, 건축, 기술 관련 업무

이러한 육부 체제는 이후 조선 시대의 육조 체제로 계승되며 한국 행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고려 육부 체제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행정의 분화와 조직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기능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 고유의 중요한 정치 기구로, 중서문하성과 함께 국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기관입니다.

도병마사는 국방과 군사 문제를 논의하던 기구로, 외적의 침입과 같은 국가 비상사태 시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주로 고위 문신과 무신이 참여하여 국가 안보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식목도감은 법률 및 제도의 제정과 개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고려는 유교적 통치 이념을 반영하여 다양한 법령과 규범을 정비했으며, 이러한 작업의 대부분이 식목도감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두 기구 모두 왕의 자문기구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실제 권력 행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중추원의 군사 및 왕명 집행 기능

중추원은 고려의 또 다른 핵심 행정기관으로, 군사와 왕명의 전달을 담당했습니다. 중추원은 추밀과 승선으로 구성되어, 추밀은 군사 정책을, 승선은 왕명을 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추밀은 국가의 주요 군사 전략과 운영을 담당했으며, 왕의 최측근으로서 고도의 신임을 받는 인물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승선은 왕의 명령을 정확히 각 부서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여, 왕권의 실질적 집행을 도왔습니다.

중추원은 중앙 행정의 실무적 측면에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보완하며, 왕권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삼사의 회계 감찰 기능

삼사는 고려의 재정 감찰 기관으로, 국가 재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회계와 감찰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는 국가 예산의 투명성과 부정 방지를 위한 장치로 마련되었습니다.

삼사는 조선시대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분화되는 기반이 되며,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기구로 발전합니다. 고려의 삼사는 비록 독립적인 권한이 약했지만, 행정의 감시 체계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감찰 제도는 현대 행정에도 중요한 교훈을 주며, 행정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평가됩니다.



지방 행정 체계의 기본 골격, 5도 양계 체제

고려의 지방행정 조직은 5도 양계 체제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5도는 일반 행정 구역이며, 양계는 군사적 경계 지역을 의미했습니다.

5도에는 안찰사가 파견되어 지방 행정을 감독하고, 치안과 세무를 관리했습니다. 반면 양계에는 병마사가 파견되어 국방과 군사 방어를 담당했습니다. 양계는 변방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이 빈번했던 지역이므로 강력한 군사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중앙집권을 유지하면서도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한 유연한 행정 운영 방식이었습니다. 고려는 이를 통해 지방 분권과 중앙 통제를 동시에 실현하려 했습니다.



지방관의 임명과 권한 구조

고려시대 지방관은 중앙정부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고, 행정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군현 단위에 임명되었으며, 수령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지방관은 조세 수취, 치안 유지, 군사 훈련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해당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며,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방관은 임기제였으며, 일정 기간 후에는 본국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이는 지방세력의 독립을 방지하고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력한 문벌 귀족 가문 출신이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아, 중앙 권력의 지역 지배력이 항상 확고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토착세력이 지방관의 권한을 제약하기도 했습니다.



향리 제도의 역할과 한계

고려의 향리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보조하는 지방 행정 실무자였습니다. 본래 지방 토착세력 출신으로 구성된 향리는 해당 지역의 행정, 세무, 호적 업무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향리는 실질적인 행정 실무를 담당하며, 지방관보다 더 많은 지역 사정에 정통했습니다.

하지만 향리는 관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하급 행정조직으로 간주되었고, 중앙으로 진출하는 데 큰 제약이 있었습니다. 이는 향리의 신분적 한계를 고착화시켰으며, 고려 말기에 이르러 향리들은 점차 불만을 품고 사회적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향리층의 불만은 결국 조선 초의 유교 중심 행정개혁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중앙과 지방 간의 권력 갈등

고려의 행정조직은 중앙집권을 추구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방과 중앙 간 권력 갈등이 빈번했습니다. 특히 문벌 귀족들이 지방 세력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명령이 원활히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또한, 외적 침입 시 지방 병력의 자율적 운용이 필요했기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기도 했습니다.

지방 세력이 강성해질수록 중앙정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지만, 현실적으로 완전한 통제는 어려웠습니다. 이는 고려 후기로 갈수록 지방 군웅의 등장과 권력 분산을 초래했고, 결국 무신 정권과 원 간섭기의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의 과거제도와 관료 충원 방식

고려는 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선발하였으며, 이는 유교적 국가 체제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과거제는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며, 그중 문과가 가장 중시되었습니다. 과거를 통해 중앙과 지방에서 인재를 등용하고, 출신에 상관없이 실력을 기준으로 관리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문벌 귀족 자제가 과거에 유리한 환경에 있었고, 일반 평민이 상층부로 진출하는 데는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관료제는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갔고, 이는 고려 정치의 경직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국자감과 교육 제도

고려시대에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국자감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국립 최고 교육기관으로, 유학을 기반으로 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학 등 여러 교육 과정이 있었고, 이는 신분에 따라 진학 가능한 계층이 달랐습니다.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국자감은 인재 배출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국자감 이외에도 사학이나 향교 등 지방 교육기관도 있었지만, 영향력은 국자감에 비해 적었습니다. 이는 수도 중심의 교육 체계를 반영한 구조였습니다.



문신과 무신의 권력 분립과 대립

고려의 행정 조직에서 문신과 무신은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았으며, 정치적 위상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문신은 주로 행정과 정치, 외교를 담당했으며, 무신은 군사와 방어 업무를 맡았습니다. 고려 전기에는 문신의 권한이 강했지만, 무신정변(1170년) 이후 무신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무신 집권기는 무신들이 정치와 군사를 모두 장악한 시기로, 행정 조직 역시 무신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문신들은 배제되었고, 정치적 탄압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고려의 행정 시스템이 안정적인 구조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예로 평가됩니다.



무신 정권기 행정 변화

무신정권기에는 기존의 중앙행정조직이 무신 권력에 의해 재편되었습니다. 중서문하성과 같은 전통적인 기관의 기능은 축소되었고, 군사 중심의 기구들이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등 무신 권력자들은 사병 조직과 별도의 행정 조직을 운영하면서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의 행정은 권위보다는 무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행정의 합리성과 체계성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지방의 독립성과 자치성도 더욱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최씨 무신정권과 교정도감 운영

최씨 무신정권은 고려 후기에 무신정권의 절정을 이룬 시기로, 최충헌과 그의 후손들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교정도감이라는 특별 행정기구가 설치되어 무신정권의 핵심 권력기구로 작용했습니다. 교정도감은 행정, 군사, 사법 등 전 분야의 권한을 집중하여 실질적인 국가 운영을 담당했습니다.

교정도감은 무신정권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로, 기존의 중앙행정기관보다 더 강력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고려의 전통적인 정치 체제와 충돌을 일으키며, 정치 혼란과 행정의 기능 저하를 초래했습니다.



원 간섭기의 행정제도 변화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시기를 겪게 되며, 행정제도 역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원은 고려에 부마국 체제를 강요하며 내정 간섭을 지속했고, 이는 고려의 독자적 행정 운영에 큰 제약을 주었습니다. 특히 정동행성 등의 기구가 설치되어 원의 지시를 직접 수행했습니다.

이 시기 고려의 행정 조직은 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왕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또한 원과 고려의 이중 통치 체제가 형성되면서 행정 효율성이 저하되고, 민생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충선왕의 행정 개혁 시도

충선왕은 원 간섭기 중 비교적 자주권 회복을 시도한 군주로, 여러 행정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사대부 중심의 행정조직을 재정비하고, 부패한 귀족 관료들을 축출하려는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또한 정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유학자들을 중용했으며, 경연 제도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원의 지속적인 간섭과 국내 귀족 세력의 반발로 인해 개혁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선왕의 시도는 고려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후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민왕의 개혁과 행정조직의 재정비

공민왕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개혁 군주로, 원 간섭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부패한 권문세족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행정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신진사대부를 등용하여 행정의 실무를 맡기고, 중앙 집권적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공민왕은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인사권을 되찾고, 과거제를 통해 인재를 충원하였습니다. 또 지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관의 권한을 통제하고, 국방 체계를 정비하여 국력을 재건했습니다. 이와 같은 개혁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왕이 암살당하면서 그 지속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은 조선시대 성리학적 중앙 행정 체제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권문세족의 행정 장악과 부작용

고려 후기에 등장한 권문세족은 대지주이자 고위 관료 집단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행정권을 사실상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와 경제, 군사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왕권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권문세족은 주요 행정 기관의 요직을 독점하며 관료제를 사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로 인해 행정의 공정성과 효율성은 크게 떨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권문세족은 지방 토지를 불법적으로 수탈하며, 향리조차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폐해는 조선 건국의 주요 원인이 되며, 성리학적 질서에 입각한 행정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습니다.



조세 행정과 전시과 제도

고려의 조세 행정은 주로 토지 기반의 세금 제도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핵심은 전시과 제도였으며, 관리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봉록 대신 지급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전시과는 직급과 공로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고, 이는 중앙 관료 충원과 군사력 확보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기능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시과는 권문세족에게 집중되었고, 일반 백성이나 하급 관리에게는 혜택이 줄어들었습니다. 더불어 농민의 토지 상실과 세금 부담은 행정 시스템의 불안정을 야기했습니다. 결국 이 제도의 붕괴는 토지 제도의 근본적 개혁과 행정 구조 재편으로 이어졌습니다.



군사 조직과 국방 행정

고려는 국방 행정을 중시했던 국가로, 상비군과 지방군의 이중 구조를 운영했습니다. 중앙에는 2군 6위라는 체계가 있었고, 지방에는 주현군과 향리군이 존재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체계였습니다.

특히 국경 지역에는 양계를 설치하고 병마사를 파견하여 국경 방어에 주력했습니다. 이러한 국방 체계는 거란, 여진, 몽골 등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실제 전투에서는 지역 장수의 능력과 조직력이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신정권기 이후 중앙군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국방 체계에도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외교 행정과 사신 제도

고려는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체계적인 행정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예부를 중심으로 외교 문서 작성, 사신 파견, 외국 사절 접대 등을 관리했으며, 외교 문서의 형식과 절차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특히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다양한 국가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 정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사신은 국가의 위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발되었으며, 외교적 언변과 학문적 소양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들은 외국과의 문화 교류, 무역 협상, 평화 조약 체결 등을 수행하며 고려의 국제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고려 외교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해결을 우선시했으며, 이러한 점에서 매우 세련된 외교 행정 체계를 유지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사법 행정과 형벌 체계

고려는 형부를 중심으로 사법 행정을 운영했습니다. 형부는 형률의 해석과 집행, 범죄자에 대한 재판, 형벌 집행을 담당하였습니다. 고려의 형법은 대체로 당나라 율령을 참고하였으며, 유교 윤리에 근거한 처벌 기준이 많았습니다.

지방에서는 지방관이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대한 사건은 중앙에 보고되어 재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려의 형벌은 태형, 장형, 유형, 사형 등으로 구분되며, 특히 반역죄와 같은 정치적 범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귀족층에 대한 처벌은 상대적으로 관대해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했습니다.



민정 행정과 호적 제도

고려의 민정 행정은 호적과 양안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호적은 개인 단위의 인구 등록 장부로, 국가가 세금과 군역을 부과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양안은 토지 등록 장부로, 조세 행정의 핵심 자료였습니다.

이러한 민정 행정은 고려가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습니다. 주기적인 조사와 갱신이 필요했지만, 실제로는 지방 향리나 권문세족의 부정 개입으로 인해 호적과 양안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민정 행정을 철저히 개혁하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고려 행정조직의 유산과 역사적 의미

고려의 행정조직은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 관료제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중앙과 지방의 이중 행정 구조, 문무 분리 원칙, 과거제 기반 인재 선발 시스템 등은 이후 조선의 행정체제에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특히 문벌 귀족 체제를 통한 안정적 행정 운영은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사회의 폐쇄성과 신분 고착을 낳기도 했습니다.

고려 행정조직의 발전은 단순한 제도적 정비를 넘어, 당시의 정치 철학과 사회 구조, 국제 정세에 따른 대응 방식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인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도 고려의 행정 시스템은 연구 가치가 높고, 한국 행정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습니다.




마무리하며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은 단순한 국가 운영의 틀을 넘어서, 정치·사회·군사·외교 등 다방면에서 체계적인 조직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나라 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려 특유의 현실적 통치 방식을 가미하여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완성해나갔습니다. 특히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이원 구조, 육부 체계,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존재는 고려 행정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또한 지방 행정의 5도 양계 체제, 향리 제도의 운용, 권문세족의 권력 장악, 그리고 무신정권기의 행정 변형은 한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개과정으로 기록됩니다. 고려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계승될 수 있는 체계적인 행정 구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합니다.

오늘날 공무원 조직, 중앙-지방 관계, 행정 윤리의 기초를 고려 시대 행정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행정 조직을 연구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연관 질문 FAQ

고려시대 최고 행정 기관은 무엇이었나요?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고려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국정 기획과 실행을 분담했습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 도병마사는 군사 정책을, 식목도감은 법령 제정과 개정을 담당한 고려 고유의 정치 기구입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어떻게 운영되었나요?
→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며 실력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하려 했지만, 문벌 귀족의 독점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지방 행정에서 향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 향리는 지방관을 보좌하는 하급 행정 실무자였으며, 지방 행정의 실제 업무를 도맡았습니다.

무신정권기 행정 변화의 특징은?
→ 군사 중심 행정으로 재편되었고, 교정도감 등의 새로운 권력 기구가 운영되었습니다.

전시과 제도는 어떤 방식이었나요?
→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제도로, 행정과 군사 운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제도였습니다.

공민왕의 행정 개혁은 무엇이 핵심이었나요?
→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과거제를 강화하여 신진사대부 중심 행정을 추진했습니다.

고려 행정조직이 조선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과거제, 육부 체계, 중앙집권 행정 방식 등이 조선 행정 시스템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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