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고려 지배, 피지배가 아닌 공존과 저항의 복합적 역사

 원나라의 고려 지배, 피지배가 아닌 공존과 저항의 복합적 역사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엽까지 약 100여 년 간, 고려는 동아시아의 초강대국 몽골제국(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 점령이 아니라, 국제정세 속에서 고려가 어떻게 생존하고 주체성을 지켰는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원에 종속되고, 또 저항했는가를 보여주는 복합적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사에서 ‘원 간섭기’라 불리며, 단지 정치적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행정, 국제 질서의 전면적인 재편 속에서 고려가 국가로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반영하는 시대입니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는 1259년 고려가 원에 항복하며 시작되었고, 1356년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으로 실질적 종속이 끝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100년 동안 고려는 명목상 자주국이었으나, 왕위 계승, 국왕 책봉, 외교, 군사, 행정, 혼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원나라의 직접적 영향과 통제를 받았습니다. 특히 고려 왕실은 원의 황족과 혼인하며 ‘왕’이라는 칭호는 유지했지만, 실제 권한은 제약을 받는 반주권 국가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단순한 피지배의 역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고려는 원의 틈바구니 속에서 왕권 강화, 경제 회복, 문화 융합, 민족 정체성 보존을 위한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고, 일부는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원 간섭기의 경험은 고려 후기에 왕권 중심 체제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이후 조선왕조 성립의 정치·사회적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 체계, 통치 방식, 고려의 대응과 변화, 문화·사회적 영향, 반원 자주화 정책 등을 총 20개의 중제목으로 나누어 구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원 간섭기의 고려를 새롭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 형성 배경

몽골 제국은 13세기 초 칭기즈 칸을 중심으로 급속히 팽창하였고,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중동까지 정복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제국은 1231년 고려에 처음 침입하였고, 이후 수차례에 걸친 침입과 고려의 항전이 이어졌습니다. 고려는 산성과 해상 방어를 통해 저항했으나, 몽골군의 군사력과 물량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1259년 원에 항복하게 됩니다.

이로써 양국은 형식상 사대 관계를 맺었고, 고려는 원 제국의 부마국이 됩니다. 이는 조공과 국왕 책봉, 혼인 관계로 이어지며 형식은 독립국, 실질은 종속국의 지위를 갖게 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부마국 체제와 고려 왕실의 변화

몽골은 고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직접적 통치보다는 간접적 종속을 유도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고려 국왕들은 원 황실의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駙馬)’, 즉 황제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명목상 왕위를 유지하되 실제 정치적 권한은 제한됩니다.

특히 충렬왕부터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에 이르기까지 원 황실 여성과 결혼한 왕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며,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의 친족으로 흡수됩니다. 이는 고려 왕의 위상과 동시에 자율성을 크게 제약하는 구조로 작용합니다.




고려 국왕의 책봉과 왕위 계승 문제

원 간섭기 동안 고려 국왕은 원 황제의 허락 없이는 즉위할 수 없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의 왕위 계승에 직접 개입, 때로는 원에서 국왕 후보를 불러 중앙에서 시험을 본 뒤 책봉하거나, 직접 폐위 또는 옹립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과 친원파·반원파 간의 정치적 투쟁이 심화되었고, 왕권은 약화되는 한편 원 황제의 신임이 국왕의 정치 생명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동행성 설치와 고려 행정 통제

원나라는 고려를 간접 지배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는 통치 기구를 개설하여 고려 정치를 감시하였습니다. 정동행성은 원 제국의 성(省) 단위 행정 조직이었고, 명목상 일본 정벌을 위한 기구였으나 고려에 상주하며 내정까지 관여하였습니다.

이 기관은 고려 관리들을 참여시키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정책 결정은 원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주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원과의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체제에 놓이게 됩니다.




다루가치 파견과 지방 통제

정동행성과 더불어 원은 고려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하여 각 지역의 세금 징수, 행정 집행, 법 집행 등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다루가치는 몽골 제국의 고유한 감독관 제도로, 중앙의 지시를 지방까지 철저히 전달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려 백성들에게는 이 다루가치들이 폭력적이고 수탈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이들의 횡포는 원 간섭기 고려 민심의 이반과 반원 감정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각 지방의 토호 세력도 이들의 감시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군사적 종속과 일본 정벌 참여

고려는 원나라의 군사 작전에 강제로 동원되었고, 특히 일본 원정(1274년·1281년)에 병력과 물자, 선박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는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으며, 많은 병사들이 실제 전투에 투입되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일본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고려는 무익한 전쟁에 따른 피해만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고, 반원 감정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경제적 수탈과 물자 요구

원 간섭기 동안 고려는 지속적으로 원에 조공과 물자, 인력, 특산물, 여자 등을 바쳐야 했습니다. 특히 인삼, 금, 은, 비단, 말 등 고려의 귀중한 자원들이 끊임없이 유출되었고, 이는 국가 경제의 침체를 가속화했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서는 세금 외에도 별도로 원에 바칠 물품을 마련하기 위한 수탈과 강제 징발이 이뤄졌고, 농민과 상공업자들의 생활 기반이 붕괴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습니다.




고려의 반원 자주화 움직임

14세기 중반, 원 제국이 점차 쇠퇴하면서 고려 내에서도 자주화 움직임이 강해집니다. 특히 공민왕(재위 1351~1374)원의 간섭을 제거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는 정동행성과 다루가치를 폐지하고, 몽골식 관제와 의복, 언어,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원과의 혼인 관계도 단절시키는 등 전면적인 반원 노선을 걸었습니다. 이는 고려사에서 가장 뚜렷한 자주적 개혁 통치의 사례로 평가됩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책

공민왕은 즉위 이후 가장 먼저 원의 영향력 제거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는 1356년 정동행성과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고려 영토에서 다루가치를 추방함으로써 사실상 원의 내정 간섭을 완전히 배제합니다. 이 과정에서 친원 세력인 기씨 일족을 숙청하고, 자주파 관리들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그는 몽골식 관복과 몽골어 사용, 성씨와 혼인 관습 등을 철폐하고, 고려 고유의 문화와 정치체제를 회복하려는 ‘반몽(反蒙) 문화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공민왕의 정책은 고려 역사에서 가장 과감하고 체계적인 자주화 개혁으로 평가되며, 고려가 다시 주권을 되찾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쌍성총관부 탈환과 국토 회복

원 간섭기 동안 고려 북부 영토는 원에 의해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사실상 고려 본국의 지배권이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공민왕은 1356년 최영, 이성계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 이 지역을 다시 고려의 통치하에 둡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라, 원 제국의 붕괴 국면을 틈탄 고려의 자주 회복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쌍성총관부는 정치적으로도 고려 중앙 권력이 북부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반원 정책에 대한 내부 반발

공민왕의 반원 정책은 원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탄 현실적 선택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기득권을 잃은 친원 세력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특히 왕비의 친족이자 원 황실과 밀접했던 기씨 일족은 큰 피해를 보았고, 이를 빌미로 정치적 암살과 쿠데타 시도도 이어졌습니다.

공민왕은 이를 철저하게 탄압하며 왕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과 측근 중심의 정국 운영은 오히려 정치 불안정성을 초래하였고, 결국 왕권 강화를 위한 도전이 역설적으로 또 다른 권력 싸움을 낳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 후기에 미친 원 간섭기의 유산

원 간섭기는 끝났지만, 그 유산은 고려 말까지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고려 귀족 사회의 몽골화, 중앙과 지방의 관료제 변화, 관직 제도, 언어 습관, 복식 등의 문화 요소에서 원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았습니다.

또한 군사 체제와 외교 관념, 왕권에 대한 인식에서도 여전히 원의 체제가 그림자처럼 작용하였고, 이는 조선왕조 초기 정치체계 설계 시 반면교사로 삼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원 간섭기는 고려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자주 의식과 정치 개혁의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원 간섭기 속 문화 교류와 융합

원 간섭기 동안 고려는 단지 피지배 국가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몽골과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새로운 융합 문화를 창조하기도 했습니다. 고려청자, 나전칠기, 불교 예술 등은 몽골풍과 고려 전통이 결합된 형태로 발전하였고, 문학과 음악, 미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고려 왕실 여성들의 몽골 황족 출신화, 몽골식 관혼상제 풍습 도입, 음식 문화의 교류 등은 고려 문화의 다층성과 국제성을 증명합니다. 이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종속되어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능동적 융합을 시도한 고려의 저력을 보여줍니다.




고려 불교에 미친 몽골의 영향

원 간섭기 동안 불교는 크게 융성했습니다. 이는 몽골 황실과 귀족들이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신봉하면서 불교를 후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이를 활용하여 왕실 주도의 불교 정치를 펼쳤으며, 왕실 사찰과 불교 행사를 통해 권위를 강화했습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승려인 지공, 혜근, 보우 등은 원 황실과 교류하며 고려 불교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고, 원과 고려 양국 간의 불교 교류와 고승 파견은 사상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불교는 왕권과 원 황실의 연결 매개체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고려 여성의 지위와 원 간섭기의 변화

원 간섭기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고려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고, 이를 통해 고려 왕실 여성들도 혼인 외교와 정치적 중개자로서 활동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 등 몽골 황실 출신 공주들은 정치에 직접 개입하거나, 국왕 교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조선시대 유교적 여성관과는 다른 고려 여성의 활발한 역할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고려 민중의 저항과 반몽 운동

원 간섭기에 가장 고통을 겪은 것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고려 각지에서는 원에 대한 불만과 저항 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농민과 천민 계층에서는 수탈, 강제노역, 병력 징발 등에 대한 분노가 팽배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홍건적의 침입이나 왜구의 출몰 등 혼란한 외부 정세가 겹치며 민중 봉기가 증가하였고,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지지 역시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 민중의 정치 참여와 집단 행동의 자각이 커지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원 간섭기 이후 조선 건국과의 연계

고려는 원 간섭기 동안 정치적 종속과 왕권 약화, 민중 불만의 누적이라는 위기를 겪었고, 이는 결국 고려 말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실패, 연이은 왕권 약화, 권문세족의 횡포, 왜구의 침입 등 복합적인 위기는 조선 건국의 정치적 명분이자 배경이 됩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원 간섭기와 고려 후기를 반면교사로 삼아 강력한 왕권 중심의 조선 체제를 설계하였고, 자주성, 왕권 강화, 유교 정치 이념을 새롭게 도입하여 조선 건국의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원 간섭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원 간섭기는 단순히 ‘몽골의 지배 시기’라는 시각으로만 보기엔 부족합니다. 이 시기는 피지배와 저항, 공존과 융합, 종속과 주체성 확보가 동시에 진행된 복합적 시기였습니다.

고려는 원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공민왕 대에 이를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기는 오늘날 외세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주체성을 유지할 것인가, 문화 융합 속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역사적 사례입니다.




연관 질문 FAQ

1. 원 간섭기는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 일반적으로 1259년 고려의 항복부터 1356년 공민왕의 정동행성 폐지까지 약 100년간입니다.

2. 고려는 완전히 원나라에 복속되었나요?
→ 명목상 독립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왕 책봉, 행정 통제 등에서 원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3. 다루가치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 원에서 파견한 지방 감찰관으로, 세금 징수, 법 집행 등을 통해 고려 내정을 통제했습니다.

4. 정동행성이란 무엇인가요?
→ 원이 일본 원정을 명분으로 고려에 설치한 행정 기구로, 실질적으로 고려 통치 기구 역할을 했습니다.

5. 고려 왕실과 원 황실은 어떤 관계였나요?
→ 고려 국왕들은 원 황실 공주와 혼인하며 부마국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6. 공민왕은 어떤 개혁을 했나요?
→ 원 간섭 철폐, 다루가치 축출, 친원파 숙청, 국토 회복, 몽골 문화 제거 등의 자주 정책을 펼쳤습니다.

7. 원 간섭기가 문화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복식, 관제, 언어, 예술, 불교 등에서 몽골과의 융합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8. 원 간섭기는 조선 건국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 고려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자주성 회복 운동이 조선 건국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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