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乙巳五賊), 그들은 왜 역사에 ‘민족의 반역자’로 남았나?

 을사오적(乙巳五賊), 그들은 왜 역사에 ‘민족의 반역자’로 남았나?

1905년, 대한제국의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던 그해, 조선의 근대사를 통틀어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을사늑약’이라 불리는 제2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거나 묵인한 대한제국 고위 관료 5인을 일컬어 우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단순한 협상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나라를 외세에 넘긴 댓가로 권력과 개인의 안위를 선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국민을 배신한 자들’, ‘매국노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죠. 이 글에서는 을사오적의 명단, 행적, 당시의 역사적 맥락, 그들이 남긴 영향, 후손들의 논란까지 낱낱이 살펴보며, 우리가 이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를 되짚어보겠습니다.





을사오적이란 누구인가?

‘을사오적’은 1905년(을사년)에 제2차 한일협약 체결을 주도하거나 찬성한 5명의 대한제국 대신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현입니다. 당시 황제 고종은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반대하며 자결을 시도한 이들이 있을 정도로 협약에 대한 반감은 거셌습니다. 하지만 이 5인은 일본의 강요와 회유 속에 민족 자결권을 저버리고 국권을 넘겼습니다.



을사오적 명단

이름당시 직책주요 역할
이완용(李完用)외부대신실질적인 협상 주도자, 대표적인 매국노로 역사에 남음
이근택(李根澤)군부대신일본의 군사권 장악을 묵인하고 찬성
이지용(李址鎔)내부대신경찰과 치안에 대한 일본 지배를 수용
박제순(朴齊純)법부대신사법권의 침탈을 방관하고 지지
권중현(權重顯)학부대신교육권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묵인

이 5인은 당시 회의에서 격렬히 반대한 고종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여 을사늑약 체결을 ‘합의’한 장본인들입니다.




을사늑약은 무엇인가?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의 핵심 내용

1905년 11월 17일,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완전히 빼앗기는 조약입니다.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은 이를 위임받는다

  • 일본은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내정 간섭을 시작한다

  • 한국 내 일본인 보호를 명목으로 군사력 주둔 정당화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잃게 되었고,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왜 '늑약(勒約)'인가?

‘늑약’은 ‘억지로 체결한 조약’이라는 뜻으로, 고종 황제의 직접적인 반대서명 거부, 그리고 당시 국제법적 절차의 미비를 이유로 국제적으로도 정당성이 없는 조약이었습니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협박하여 이 조약을 강행했습니다.




을사오적의 행적과 그 후

을사오적들은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이후에도 일본에 충성하며 귀족 작위를 받고 금전적 대가를 얻었습니다.

이완용

  • 귀족 작위: 자작 → 후작 승격

  • 기타 행적: 한일 병합조약 체결 시에도 핵심 역할, 자결한 민족지도자들의 비난을 받음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 모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 및 연금 수령

  • 일본 귀족으로서 명목상 일본 황실에 충성




당시의 국내 반응: 순국과 저항

  • 고종 황제: 조약에 반대 의사를 밝히고 서명 거부

  • 민영환: 을사늑약에 항의하며 자결

  • 조병세, 이상설, 장지연 등: 격렬히 규탄, 해외에 고발문 발송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은 곧 통곡할 날이로다”라고 절규한 칼럼



을사오적에 대한 역사적 단죄

1907년 고종의 밀사 파견 (헤이그 특사)

  •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외교적 노력

  • 실패했지만 을사오적의 책임을 역사적으로 각인시키는 계기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테러 시도

  • 일부 을사오적에 대해 의열단, 독립운동가들이 암살 시도

  • 실제로 이완용은 여러 차례 피습당함

해방 이후에도 "법적 단죄"는 없었음

  •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을사오적 후손 중 일부는 계속 부유하게 생활




을사오적 후손과 논란

을사오적의 후손 중 일부는 현재까지 재산 유지 또는 사회 활동을 지속하며 비판받고 있습니다.

  • 이완용 후손: 사과 없이 재산 소유 지속

  • 일부 후손: 자신의 선조가 매국노가 아님을 주장하거나 역사 왜곡을 시도

이에 따라 시민단체들은 친일파 재산 환수 운동, 역사교육 강화 운동 등을 전개하며 여전히 을사오적 청산이 미완의 과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을사오적을 기억해야 할까?

  • 단순한 과거의 인물이 아닌, 오늘날 ‘국가와 민족의 책임’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하는 사례

  • 권력과 사리사욕을 위해 민족을 팔아넘긴 대표적인 인물들

  • 현대 정치와 사회에서도 반복되지 않기 위해 교훈이 되는 역사

  •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그 연속선상에서 을사오적은 여전히 유효한 상징




FAQ: 을사오적 관련 자주 묻는 질문

Q1. 을사오적은 왜 '오적(五賊)'이라 불리나요?
A1. ‘을사년(1905년)’에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다섯 명의 대신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졌습니다.

Q2. 고종은 왜 을사늑약을 막지 못했나요?
A2. 직접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일본의 군사력과 강압 앞에 실질적인 저항이 어려웠습니다.

Q3. 을사오적 중 가장 비난받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A3. 이완용이 대표적입니다. 외교권 박탈뿐만 아니라 한일병합에도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Q4. 이들이 돈을 얼마나 받았나요?
A4. 구체적인 액수는 다르지만, 작위와 함께 대규모 연금과 토지를 하사받았습니다.

Q5. 을사오적과 친일파는 동일한 개념인가요?
A5. 을사오적은 대표적인 친일파입니다. 친일파는 더 넓은 범위로, 일제에 협력한 모든 이들을 포함합니다.

Q6. 후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나요?
A6.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개인의 ‘대역죄’를 후손에게 묻지 않지만, 친일재산 환수법에 따라 일부 조치는 가능했습니다.

Q7. 을사늑약은 법적으로 유효한 조약이었나요?
A7. 고종의 재가 없이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이 강하며, 일본 측도 이를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Q8. 교과서에 을사오적은 어떻게 다뤄지나요?
A8. 대부분 비판적인 시각으로 다루며, 대한민국 역사 속 대표적인 ‘매국노’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