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전 과정: 6월 항쟁에서 6·29 선언, 제9차 헌법 개정까지
1987년,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즉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도록 헌법을 바꾸는 중대한 개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제도 변화가 아니라, 국민의 손으로 권력을 되찾은 역사적 사건이자,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끝내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결정적 분기점이었습니다.
이 개헌의 출발점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전두환 정권의 비민주적 통치와 5공화국 체제의 한계였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간접선거(체육관 선거)로 뽑히며,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탄압, 언론 통제, 야당 탄압,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으로 국민 불만은 극에 달했고,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라는 전국적 저항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배경, 6월 항쟁의 전개, 6·29 선언의 내용과 의미, 제9차 헌법 개정 과정, 그리고 직선제 도입 이후의 변화와 역사적 의의까지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민주주의의 승리를 만든 이 순간을 통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투표권과 참정권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5공화국 체제와 간접선거의 문제점
1980년대 초, 전두환이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며 제5공화국 체제가 시작됩니다. 1980년 제8차 헌법 개정을 통해 만든 이 체제는,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규정했지만, 간접선거 방식인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불린 이 방식은 국민의 직접 의사와는 무관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권위주의 정권의 유지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야당과 시민단체,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직선제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하거나 탄압했습니다.
호헌조치 발표와 국민의 분노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전 국민이 기대하던 정치개혁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호헌조치(護憲措施)를 발표합니다. 이는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즉 직선제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발표는 시민사회와 야당, 학생, 종교계, 노동계 전반에 걸쳐 분노와 실망을 일으켰고, 민주화 요구는 더욱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야당의 유력 주자였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은 직선제 개헌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고, 국민들은 본격적인 민주항쟁의 길로 들어섭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민주화 촉발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철이 경찰 조사 도중 물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은 이를 축소·은폐하려 했으나, 언론 보도를 통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공개되며 국민적 공분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고문 없는 나라,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각계 시민단체, 대학생들의 연대가 본격화되며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산됩니다.
6월 항쟁의 발발과 전국적 확산
1987년 6월 10일, 정부는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합니다. 같은 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이를 계기로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됩니다. 이 항쟁은 수많은 대학생, 시민, 노동자, 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전국적 시민운동으로, 6월 한 달 동안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쟁으로 기록됩니다.
특히 6월 26일은 ‘국민 평화대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시민과 경찰이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평화적 저항으로 전환되면서 국민 여론은 민주항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6·29 선언의 발표
1987년 6월 29일, 당시 여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전격적으로 8개 항의 특별선언, 즉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는 사실상 국민적 요구에 굴복한 것이며, 직선제를 수용하고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통령 직선제 수용 및 관련 헌법 개정
-
김대중 등의 정치적 활동 자유 보장
-
양심수 석방 및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확대
-
지방자치제 점진적 실시
-
인권 신장과 정당한 절차의 보장
이 선언은 민주세력에게는 시민 항쟁의 승리를 의미했고,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획기적 전환점이 됩니다.
제9차 헌법 개정과 직선제 도입
6·29 선언 이후, 정치권은 여야 합의 하에 헌법 개정 논의에 들어갑니다. 그 결과 제9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통령 직선제 도입 (임기 5년, 중임 금지)
-
기본권 강화 (인간의 존엄성,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확대)
-
국회의 권한 강화
-
지방자치제 확대 명시
-
헌법재판소 설치로 사법부 독립 강화
1987년 10월 27일, 이 개헌안은 국민투표를 통해 투표율 78.2%, 찬성률 93.1%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확정됩니다. 드디어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결과
새 헌법에 따라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에는 노태우(민정당), 김영삼(통일민주당), 김대중(평화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 등이 출마했으며, 여권 단일 후보였던 노태우가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됩니다.
야당은 표가 분산되어 패배했지만, 국민이 처음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지대했습니다. 이 선거를 통해 군사정권의 후계자도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만 집권할 수 있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입니다.
직선제 이후 한국 정치의 변화
직선제 개헌은 이후 한국 정치에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선출되며 정통성이 확보됨.
-
시민의 정치 참여 확대: 선거, 토론, 집회에 대한 시민 권리 의식 강화.
-
야당의 성장: 김대중·김영삼 등의 정치 활동 자유와 이후 정권교체의 길 마련.
-
정치적 다양성 확대: 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김.
직선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대한민국은 매번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며 민주주의를 심화시켜왔습니다.
연관 질문 FAQ
왜 대통령 직선제가 중요했나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정치의 정당성과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대통령을 어떻게 뽑았나요?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출했으며, 대부분 여권이 주도하는 ‘체육관 선거’였습니다.
6·29 선언은 누가 발표했나요?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발표했습니다.
박종철 사건이 왜 중요한가요?
국가 폭력과 인권 탄압의 실상이 드러나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6월 항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고, 시민의 정치 참여 권리를 확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야당 분열로 인해 표가 갈라진 결과였습니다.
직선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1987년 제9차 헌법 개정 이후, 같은 해 12월에 처음 실시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대통령 선거 방식은 어떻게 되나요?
전국 단위의 직접선거로, 만 18세 이상 국민이 참여하며 임기 5년 단임제입니다.